
2018년 개봉한 영화 게이트는 실제 국정농단 사태를 모티브로 삼아, 흑수저 서민들이 비선실세의 비자금 금고를 털어버리는 통쾌한 범죄 코미디입니다. 처음 이 영화 소개를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정치 비리라는 무거운 소재를 코미디로 풀어낸다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국정농단이라는 묵직한 소재, 코미디로 녹여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정치 범죄물은 무겁고 어둡게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실제로 영화 게이트를 보니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영화는 현실의 국정농단, 즉 대통령 측근이나 비선 실세가 국가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그 주인공을 기억을 잃은 엘리트 검사와 사채에 쫓기는 자매, 교도소를 들락날락하는 전설의 대도로 채웠습니다. 묵직한 현실을 희극적인 캐릭터들로 걸러낸 셈입니다.
여기서 비선실세란 공식 직책 없이 국정에 개입하는 실질적 권력자를 뜻합니다. 2016~2017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대표적 사례로, 헌법재판소는 2017년 3월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습니다(출처: 헌법재판소). 영화는 이 사건의 구조, 즉 청와대 내부 문건 유출과 검은 비자금, 권력과 사채 조직의 유착을 픽션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제가 주목한 건 장르 혼합 방식이었습니다. 범죄 코미디라는 장르는 흔히 케이퍼 무비(Caper Movie)라고 불립니다. 케이퍼 무비란 주인공들이 치밀한 계획 또는 엉성한 즉흥으로 도둑질이나 사기를 저지르는 과정을 유머와 함께 풀어내는 장르입니다. 할리우드의 오션스 일레븐 시리즈가 대표적인데, 게이트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국내 케이퍼 무비 중에서도 꽤 드문 시도라고 느꼈습니다.
캐릭터 앙상블이 만드는 화학반응
영화의 핵심 매력은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 즉 앙상블 캐스팅에 있습니다. 앙상블 캐스팅이란 주연 한 명에게 서사를 집중시키는 대신, 개성 강한 여러 캐릭터가 동등한 비중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를 말합니다. 임창정, 정려원, 이문식, 정상훈이 각자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한 팀으로 묶이는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예상 밖이었던 부분은 임창정의 캐릭터였습니다. 엘리트 검사에서 동네 바보로 전락한 규철은 찌질함과 의리 사이를 오가는데, 그 낙차가 의외로 웃기면서도 뭉클했습니다. 특히 사채업자 앞에서 법 조항을 떠올리려다 완전히 망신당하는 장면은,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괴리를 코믹하게 드러냅니다.
영화 속 오합지졸 팀의 구성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기억을 잃은 전직 특수검사 규철 — 법 지식과 의외의 판단력
- 사채에 쫓기는 자매 소원과 미에 — 담대함과 기지
- 출소한 전설적 금고털이범 장춘 — 현장 경험과 손 기술
- 해커와 해커 어머니 — 디지털 보안 해제 능력
각자 결함투성이지만,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 정교합니다. 저는 이 구조에서 대학 시절 공모전 팀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저희 팀도 주변에서 무모한 도전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코딩 속도가 느린 팀원, 발표를 유난히 잘하는 팀원,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에만 유독 감각 있는 팀원. 겉에서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었는데, 결국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팀 시너지는 개인 스펙의 합산이 아니라 역할의 맞물림에서 나온다는 걸 그때 체감했습니다.
국내 영화 관객 데이터를 보면 2018년 개봉 당시 게이트는 극장 성적보다 이후 스트리밍 플랫폼에서의 재발견으로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트리밍 OTT(Over-The-Top) 플랫폼 확산이 이른바 '숨은 명작'의 재평가를 가능하게 한 현상입니다. OTT란 기존 방송망이나 케이블을 거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하며, 넷플릭스·웨이브·왓챠 등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OTT 이용률은 2020년 이후 빠르게 증가해 2023년 기준 성인 기준 이용률이 60%를 넘어섰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권력을 거꾸로 뒤집는 서사, 현실에서도 유효한가
일반적으로 카타르시스(Catharsis) 영화는 현실의 답답함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데 그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관객이 극적 경험을 통해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키는 심리적 정화 작용을 뜻합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런 영화들이 단순 해소에만 머무는 건 아닙니다. 보고 나서 한동안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거든요.
게이트는 그 점에서 영리한 선택을 합니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지나치게 깔끔하지 않습니다. 장춘이 혼자 뒤를 책임지겠다고 남아 자수하려는 장면, 소원이 결국 아버지의 결심을 이해하고 현장을 떠나는 장면은 단순한 통쾌함 이상의 감정을 남깁니다. 희생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코미디 안에 조용히 얹어놓은 셈입니다.
역대급 캐스팅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코믹 연기 장인들이 단순히 웃음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웃음 뒤에 쓸쓸함을 남기는 연기를 해냅니다. 정상훈이 연기하는 철수가 아무말 대잔치로 경비원을 따돌리는 장면은 웃기지만, 그 웃음 뒤에 살아남으려는 소시민의 긴장감이 깔려 있습니다.
복잡한 사전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지만, 2016년 전후 한국 사회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훨씬 층위 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무거운 현실을 유쾌하게 소화하면서도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영화 게이트는 넷플릭스에서 충분히 시간을 쓸 만한 선택입니다. 먼저 예고편만 가볍게 확인해보시고 판단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