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전쟁 영화란 결국 누군가의 영웅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지전》은 달랐습니다. 이념도, 승리도 아닌 '왜 싸우는지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그게 오히려 훨씬 더 깊이 박혔습니다.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갉아먹는지, 그 구조의 냉혹함을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느낀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뺏고 뺏기는 전투, 비극적 결말의 구조
여러분은 같은 고지를 수십 번 오르내리는 전투가 얼마나 소모적인지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고지전》의 배경인 '에로 고지'는 6.25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와 화살머리 고지를 모티브로 창조된 가상의 장소입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를 구성하는 핵심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철의 삼각지대란, 평강·김화·철원을 잇는 지리적 삼각형으로, 중부전선 장악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strategic strongpoint)를 의미합니다. 북한군은 이곳을 대한민국 공격의 본부 역할로 삼았고, 양측 모두 결코 물러설 수 없는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중공군(中共軍)은 4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섬멸전(殲滅戰)을 구사합니다. 섬멸전이란 적의 전력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술로, 중공군은 낮에 철저히 은폐하다가 밤이 되면 포위망을 좁히며 사방에서 국군을 압박했습니다. 국군은 이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병사들 사이에서 이를 '인해전술'이라 불렀습니다. 실제로 6.25 전쟁 당시 중공군은 무선통신이 부족해 나팔과 꽹과리로 병사 간 의사소통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전투의 참혹함보다 시스템의 잔혹함에 더 눈이 갔습니다. 고지를 빼앗기면 다시 올라가고, 또 빼앗기면 또 올라가는 구조. 그 반복 속에서 병사들이 무너져가는 방식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고지전》이 묘사하는 비극적 결말의 핵심 구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전협정(停戰協定) 조인 이후 효력 발생까지 12시간의 공백이 존재했습니다.
- 그 12시간 동안 일부 부대는 영토를 1m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 실제 한반도의 총성이 멈춘 것은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였습니다.
- 마지막 고지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전쟁 시스템이 개인을 무너뜨리는 방식
"내가 왜 싸우는지 알아? 처음엔 똑똑히 알았는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 이 대사 한 줄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념이나 승리가 아닌, 그냥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 이것이 《고지전》이 기존 전쟁 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입니다.
영화에는 모르핀(morphine)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르핀이란 아편 계열의 강력한 진통제로, 극심한 통증 완화에 쓰이는 마약성 의약품입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병사가 이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무너져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실존적 고통이 더 깊이 곪아 있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영화를 보면서 묘하게 겹쳐 보이는 경험이 있었습니다. 산업기능요원 편입을 준비하던 시기, 시스템이 요구하는 자격 요건과 절차적 규제를 통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입해야 했습니다. 산업기능요원이란 병역 대체 복무 제도의 일환으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인력이 군 복무 대신 산업 현장에서 국가에 기여하는 제도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합법적 대안을 준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구조의 무게감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습니다.
방첩대(防諜隊) 역시 이 영화의 구조적 냉혹함을 드러내는 장치입니다. 방첩대란 군부대 내 간첩 활동을 감시하고 내통 세력을 색출하는 군사 기구로, 민간인에게까지 수사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아군을 감시하고, 동료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 구조 안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서서히 마모되어 갑니다. 영화 속 음표가 상부 보고를 망설이는 장면은, 시스템이 충성과 인간적 감정을 어떻게 충돌시키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순간이었습니다.
6.25 전쟁 전체 기간 동안 국군과 유엔군 사상자는 약 77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이 숫자 뒤에는 각자의 이름과 이야기가 있었고, 영화는 그 이름들 중 몇 개를 조명합니다.
청춘의 희생,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정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 조인된 1953년 7월 27일, 협정은 밤 10시부터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정전협정이란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 행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합의로, 엄밀히 말해 한반도는 아직도 종전(終戰) 상태가 아닙니다. 효력이 발생하기 전 12시간, 일부에서는 그 마지막 순간에도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결국 마지막 총성이 울리는 순간까지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마지막 돌격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살아남은 단 한 명이 허무한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는 그 정지 화면이었습니다. 이겼는지, 졌는지조차 불분명한 표정. 아마도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핵심 메시지가 거기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국군 병사의 평균 연령은 20대 초반이었다고 합니다(출처: 국가보훈부). 지금 저와 비슷한 나이의 청춘들이 이유를 모른 채, 혹은 이유를 잊어버린 채 죽어갔다는 사실은 어떤 거대 담론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닿습니다.
《고지전》은 2011년 개봉 당시 '전쟁의 구조적 허무함'을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은 장훈 감독의 작품입니다. 영웅도, 악당도 아닌 시스템의 부품으로 소모되어 가는 인간을 그린다는 점에서, 6.25를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정직한 시선을 가진 작품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6월이 되면 늘 반복되는 형식적인 추모 행사보다, 이 영화 한 편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해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평화와 자유가 어떤 허무한 죽음들 위에 얹혀 있는지, 적어도 한 번쯤은 똑바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고지전》을 보지 않으셨다면, 6월 안에 한 번 꼭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