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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테랑 (갑질 문화, 카타르시스, 조태오)

by 올바띵. 2026.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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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상사가 눈앞에서 규정을 무시하는 걸 봤을 때, 또는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는 걸 목격했을 때 드는 그 무기력함, 저는 그걸 꽤 오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 《베테랑》을 처음 봤을 때 스크린에서 그 감각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재벌 3세 조태오가 백이사를 글러브로 내리치는 장면에서 순간 멍해졌습니다. 현실에서 비슷한 장면을 봤던 기억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조태오가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분노를 두 배로 키운 이유

영화 속 조태오의 '맷값 폭행' 장면은 단순히 극적 설정이 아닙니다. 이 에피소드는 실제 재벌가 인물이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금전으로 무마하려 했던 사건에서 직접 모티브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고 분노가 올라왔던 이유는,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이 영화관 밖에도 존재한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태오라는 캐릭터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건 그가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배다른 형제들과의 경영권 승계 경쟁 속에서 열등감을 억누르고 있는 인물입니다. 여기서 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태도란, 단순히 뻔뻔하다는 의미를 넘어,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감각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조태오가 딱 그 케이스입니다. 인터뷰에서 유아인 배우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 캐릭터에게는 죄의식의 흔적조차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벌레를 아무렇지 않게 짓이기듯, 자신의 행동에 윤리적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 그게 조태오가 역대급 악역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제가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목격했던 일도 본질적으로 같았습니다. 사장의 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정해진 규정을 무시하고 다른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던 사람. 그 상황에서 저는 묵인하지 않고 관리자에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그냥 넘어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영화 속 관할 경찰서 형사가 사건을 무마하려던 장면과 정확히 겹치는 경험이었습니다.

갑질(甲乙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갑이 을에게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행태)은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묵인되어온 구조적 문제입니다.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1만 건을 넘어섰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수치만 봐도 이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 제가 특히 주목했던 건 조태오에게 '연민의 여지'를 주지 않기로 한 연출 결정이었습니다. 보통 악역에게는 비극적 배경이나 인간적인 면을 조금씩 부여해 관객이 복잡한 감정을 갖게 만드는데, 《베테랑》은 그 공식을 거부했습니다. 악은 악으로 명확히 그리고, 그 공백을 채우는 건 관객의 분노입니다. 저는 이 선택이 이 영화가 천만 관객을 끌어모은 핵심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조태오의 행태가 영화적으로 설득력을 가지는 구조적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배다른 형제 간 경영권 분쟁이라는 열등감의 서사
  • 물질(맷값)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왜곡된 자본 논리
  • 주변 인물들(최상무, 관할 형사)의 묵인과 공모 구조
  • 글러브를 나눠주는 연출처럼, 위기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오만함

서도철이 판타지인 이유, 그래서 더 필요한 이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이 대사 하나로 영화 전체의 주제가 압축됩니다. 여기서 '가오'란 자존심, 체면, 품위를 통틀어 이르는 표현입니다. 경제적 약자임에도 원칙 앞에서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서도철은 그 대사를 말로만 하지 않고 행동으로 증명합니다.

사실 제 경험상 이런 사람은 현실에서 찾기 쉽지 않습니다. 단체 생활을 조율하던 시절, 저는 원칙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주변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시스템이 약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개인이 원칙을 고수한다는 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서도철이 판타지인 겁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천만 명의 마음을 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개념이 여기서 정확히 작동합니다. 카타르시스란 억압된 감정이 예술적 경험을 통해 분출되며 심리적 해소와 정화를 경험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론에서 정의한 개념인데, 《베테랑》은 비극이 아닌 액션 스릴러에서 이 효과를 정확히 구현해냈습니다. 현실에서 참아온 것들을 스크린 속 서도철이 대신 해결해주는 구조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명동 한복판에서 조태오와 서도철이 맞붙는 시퀀스(sequence, 영화에서 독립적인 서사 단위를 이루는 장면들의 연속)는 단순한 액션 씬을 넘어섭니다. 여기서 시퀀스란 단편적인 장면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완결된 흐름을 이루는 단위를 의미합니다. 황정민 배우가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이 장면은 5일 밤낮 촬영으로 영화 상에는 1분 남짓만 남은 장면입니다. 그 밀도가 화면에서 그대로 느껴집니다.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손에 땀이 날 정도였는데, 단순히 액션이 멋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언젠가 저런 식으로 부당한 상황을 정리하고 싶다는, 굉장히 원초적인 감정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테랑》은 2015년 개봉 당시 국내 역대 흥행 순위 3위에 올랐습니다(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명량, 극한직업, 괴물과 함께 언급되는 이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그 중 유일한 액션 스릴러라는 사실입니다. 장르물이 이 자리에 오른 건 단순한 흥행 운이 아닙니다. 영화가 건드린 정서가 그만큼 광범위하고 보편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베테랑》을 다시 보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 이유는 이 영화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면서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말을 내준다는 점일 겁니다. 현실에서 조태오 같은 사람이 반드시 법정에 서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이래야 한다"는 기준을 남깁니다. 저는 그게 이 영화가 오랫동안 회자되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상황을 마주할 때 영화처럼 통쾌하게 해결할 수 없더라도, 원칙을 붙드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많아질수록 조태오 같은 사람들이 설 자리는 좁아집니다. 《베테랑》이 남긴 건 카타르시스만이 아닙니다. 서도철의 태도를 조금씩 빌려 살아가자는 조용한 다짐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이라면 지금 당장 보셔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IJeqBJuWL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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