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리더십이란 '결과를 뽑아내는 능력'이라고 믿었습니다. 팀을 이끌면서 규칙을 강요하고 일정을 밀어붙이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확신했죠. 그런데 돌아온 건 삐걱대는 분위기와 팀원들의 무너진 사기였습니다. 영화 '왕이 된 남자'를 보면서 그때의 제 모습이 뜨끔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광해와 하선, 같은 얼굴 다른 통치철학
조선의 임금 광해는 신하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은수저로 독 여부를 확인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상태로 궁궐을 지배했죠. 심리학에서 말하는 과대망상적 권력 집착, 즉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통제와 숙청에 의존하는 방어적 리더십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서 방어적 리더십이란 외부의 위협을 차단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하느라 정작 조직 내부를 돌보지 못하는 리더 행동 방식을 의미합니다.
반면 천민 광대 출신의 하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궁궐을 채워 나갑니다. 처음에는 그저 돈 때문에 임금 역할을 맡았지만, 점차 백성들의 삶을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궁녀 사월의 아버지가 과중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는 장면은, 단순한 감정 이입이 아니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통치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측은지심이란 맹자가 말한 인(仁)의 단초로, 타인의 고통을 보고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는 감정을 가리킵니다.
제가 대학 시절 팀 프로젝트 조장을 맡았을 때를 돌이켜 보면 부끄럽습니다. 팀원 한 명이 개인 사정으로 진도를 못 따라오고 있었는데, 저는 그 사람의 사정을 물어볼 생각도 없이 일정만 다그쳤습니다. 광해가 은수저만 들여다보던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죠.
대동법, 그리고 '하나를 내어 주고 하나를 받는' 정치
영화에서 하선이 가장 강하게 밀어붙이는 정책은 바로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이란 조선 시대 공납제도(貢納制度)를 개혁한 세제로, 지방에서 현물로 바치던 각종 세금을 쌀이나 포목 등으로 통일하여 납부하게 한 법입니다. 쉽게 말해 농민들이 관아의 요구에 따라 구하기 어려운 물품을 억지로 마련해야 했던 부담을 줄이고, 땅의 넓이에 따라 공평하게 세금을 내도록 한 제도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무려 100년이 걸렸습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 계층의 거센 반발 때문이었죠(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영화 속 박충서 같은 이조판서 세력이 대동법을 막으려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선이 "문제 가진 이가 더 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쏘아붙이는 장면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조세형평성(租稅衡平性)의 원칙을 꿰뚫는 발언입니다. 조세형평성이란 납세자의 부담 능력에 비례하여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조세 원칙으로, 오늘날 소득세 누진세율의 근거가 되는 개념입니다.
제가 직접 팀을 이끌며 느낀 것도 비슷합니다. 모든 팀원에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게 공평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량과 상황이 다른 구성원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불공정해집니다. 하선이 팥죽을 나누며 "살아있어야 팥죽도 먹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하선이 권력의 정점에서 실천한 리더십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측근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경청 리더십
- 대동법 시행처럼 단기 저항을 감수하고 장기 이익을 추구하는 결단력
- 팥죽 한 그릇, 궁녀들의 끼니 걱정처럼 작은 것부터 챙기는 세심함
- 자결을 시도한 중전의 은장도 칼날을 없애는 방식으로 보호하는 배려
오늘의 리더에게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하선 같은 리더'는 실제로 가능할까요? 영화가 흥행한 이유는 단순히 이병헌의 연기력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관객들이 스크린 속 하선에게서 현실에서 보고 싶은 리더의 모습을 투영했기 때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번트 리더십이란 리더가 구성원을 '섬기는 자'의 자세로 대하며, 그들의 성장과 필요를 먼저 돌보는 리더십 철학을 의미합니다. 1977년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가 체계화한 이 개념은 하선의 통치 방식과 놀라울 만큼 맞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조직 연구에서도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한 리더 아래에서 구성원의 직무 몰입도와 심리적 안전감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제 경험상 이건 이론이 아닙니다. 팀원들의 이야기를 먼저 듣기 시작한 뒤로, 회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결과물의 완성도도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거창한 비전이나 카리스마 없이도,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분위기는 바뀔 수 있었습니다.
'왕이 된 남자'는 왕좌의 무게를 다룬 사극이지만, 결국 묻는 건 하나입니다. 당신 곁의 사람들이 팥죽을 먹었는지 확인하는 리더가 되겠느냐, 아니면 은수저만 들여다보는 리더가 되겠느냐고요. 저는 그 질문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답을 못 찾으셨다면, 이 영화 한 번 보시는 걸 권해 드립니다.